대.한.민.국.역.사.

STB상생방송 특집 다큐멘터리, <치우천황, 그는 살아있다>

황금인간 2008. 8. 8. 11:01
 
치우천황 그는 살아있다 다큐 예고편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탁록 대전

 

  한중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사의 첫 번째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무제(武帝, BCE 141~87) 때의 사관, 사마천(司馬遷)이다.

  그가 왜 한민족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는지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방 흉노족을 정벌한 한 무제는 동북아 전역에 한나라 군현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중화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위만조선(BCE 194~108)을 멸망시키고 이어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BCE 239 해모수가 개국)의 영토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동방 조선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그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사마천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 』를 편찬했고, 그 첫 번째

왜곡작품의 상징적 문구가 「오제본기 」서두에 나오는 '금살치우擒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이다. 이는 4,700년 전에 살았던 중국 한족 시조 황제 헌원이 자신에게 복종치 않고 난리를 일으키는 치우라는 인물을 잡아 죽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 치우가 누구인가? 동방 한민족의 고대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힌 지난 2천여 년의 세월 속에서 잊혀졌지만, 치우는 바로 동방을 다스리면서 우리의 영토을 가장 넓게 개척한 배달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8대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 때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방 최초의 국제전쟁인 '탁록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뛰어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었다. 이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헌원은 지남차를 만들어 싸웠다 한다. 당시 치우천황의 군대는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이 내용이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관자 』에 전해져 온다.

  마침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조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기 』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 '치우는 옛 천자였다'라고 했고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치우 군대가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금살치우'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황제 헌원으로 조작하고, '중국이 천자국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주변민족은 모두 야만족'이라는 중화사관中華史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14세 자오지 천황이며 법력이 고강하고 신용관절하며 용병술이 뛰어났다. 구리와 철을 채취하여 무기를 만들고 전쟁 때마다 안개를 일으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신농국을 병합하고 황제를 무릎 꿇렸으며 회대淮岱(산동성의 안휘, 강소성)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후에 무신의 원조로 추앙받았다. '치우'에는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산천이 모습을 바꾼다는 개벽의 의미가 들어있다.

                                                                                         [ 참고 : 개벽실제상황 ]